우리 교회에서 내 별명은 '울보 장로'다. 그 이유는 대표기도를 하다가 자주 울기 때문이다.
환갑을 넘긴 남자가 대중 앞에서 우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은 일이 아니다. 한국 문화권에서
남자가 우는 것은 나약하고 부끄러운 일로 여겨진다. 그러면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성격인 나로서도 매우 난감해진다. 그래서 나는 대표 기도를 하기 전에 울지 않으려 마음을 다진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관심을 돌릴 만한 여러 가지 상상도 준비한다. 그러나 나의 결심은 번번이 무너진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격스러워 울게 되고, 내 죄가 부끄러워 울게 된다. 부족한 나를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그러면 예배 후에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러나 성도들은 고맙게도 나를 위로해준다. "장로님, 감사해요. 저도 장로님을 따라서 같이 울었어요."
연로하신 선배 한 분은 예배 후에 일부러 찾아오셔서 말없이 내 등을 두드려 주셨다. 그분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지만, 나는 그분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분은 '성령님이 메마른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감격과 눈물을 주셨다'라며 감사하셨다.
사실 눈물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예수님도 죽은 나사로으 무덤 앞에서 우셨다. 그 눈물을 본 사람들은
'와, 예수님이 나사로를 정말 사랑하셨나 보다'라고 말했다. 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셨다.
그 처참한 종말을 생각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분의 발을 눈물과 향유로 적셨던 여인의 눈물을 귀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인정이 참 많은 분이셨다.
눈물은 슬픔을 씻어 내는 약이다. 아이들은 서러울 때 크게 소리를 지르며 운다. 배고플 때도, 억울할 때도,
엄마가 보고 싶을 때도 운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슬픔 억누르기'를 배우게 된다. 자신을 강하게 보이기 위해
슬픔을 억누르고, 자기 조절을 못하게 될까 봐 슬픔을 억누른다. 그러나 영국의 정신과 의사 모즐리 박사는
"눈물에 씻겨 내려가지 못한 슬픔은 위장을 아프게 한다"라고 말했다. 위장뿐 아니다. 가슴도 아프게 하고
우울증에 빠지게도 한다. 메마른 말과 지식만으로 마음과 영혼을 치유할 수 없다. 성령의 단비 같은 눈물이
필요하다. 기도하며 울고, 말씀을 보며 울고, 간증하며 울자. 울어야 할 때 울 수 있으면 건강한 인격이다.
/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국제정신분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