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기독교는 세상에 기준을 부여하고 표준을 바꾼다.
한 월간지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소련이 무너진 것은 로널드 레이건의 ‘악의 제국’ 발언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 말은 소련에게 딜레마였다.
미국이 악의 제국이라고 할 때에 가만히 있으면 진짜 악의 제국이 되는 것이다.
또 아니라고 반박하면 아니라는 물증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되어야 했다. 강제수용, 언론탄압, 인권탄압 등을 시정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맞추다보니 결국에는 자연히 변화되고 곧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기준’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마귀와의 싸움에서도 이 점이 중요하다.
마귀는 엉뚱한 기준으로 교회를 공격한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세상의 기준은 구제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는 교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좋은 교회의 모습인가? 아니다. 물론 교회는
이 모든 것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교회의 핵심은 아니다.
교회가 왜 어려워지는가? 이 기준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좋은 교회란 무엇인가? 좋은 교회는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이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있는 교회이다. 영혼을 살리는 교회이다.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
정직이 살아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다.
이것이 성경의 기준이다. 이런 기준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면
“네가 어떻게 기독교인이냐?”라고 물어야 한다.
아니라고 하면, 인본주의자로서는 정당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또 그렇다고 하면, 예배자가 되는 것,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 말씀의 사람이
되는 일에 힘쓰게 될 것이다.
이모든 것을 갖추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모습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결국 기준을 제대로 잡을 때 성도는 성화되고, 변화된다.
이사야가 한 일, 예레미야가 한 일이 무엇인가?
바로 기준을 세우는 것이었다. 당장 망해가는 나라를 건지는 일이 아니라 미래의 후손들에게
남길 기준을 남긴 일이었다. 그 말씀이 나중에는 미래를 변화시켰다. 끝까지 기준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기준을 세우는 사람이 되라.
변화에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기준을 붙들면 나중에는 모두 변화하게 되어 있다.
청년문화를 '밤의 문화'라고 한다. 그래서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말은 기준을 놓치고 있다. 청년문화는 '새벽문화'라는 기준을 붙들고 나가라.
그럼 결국 시간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기준을 붙드는 자를 통해서 일하신다. 여기 귀중한 말씀이 있다.
스가랴서 4장 10절을 보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다림줄이 무엇인가?
건축 현장에서 수직을 유지하도록 추를 달아 늘어뜨린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다림줄을 들고 서 있는 스룹바벨을 기뻐하셨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붙들고 서 있는 청년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는지 생각해보라.
기준, 제도화의 중요서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 기준을 세우라고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세상으로 들어가면 세상은 뒤집어지게 되어 있다.
- "감정으로 일하라" 中
기독교란 무엇인가?
기독교는 세상에 기준을 부여하고 표준을 바꾼다.
한 월간지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소련이 무너진 것은 로널드 레이건의 ‘악의 제국’ 발언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 말은 소련에게 딜레마였다.
미국이 악의 제국이라고 할 때에 가만히 있으면 진짜 악의 제국이 되는 것이다.
또 아니라고 반박하면 아니라는 물증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되어야 했다. 강제수용, 언론탄압, 인권탄압 등을 시정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맞추다보니 결국에는 자연히 변화되고 곧 무너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기준’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마귀와의 싸움에서도 이 점이 중요하다.
마귀는 엉뚱한 기준으로 교회를 공격한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세상의 기준은 구제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는 교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좋은 교회의 모습인가? 아니다. 물론 교회는
이 모든 것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교회의 핵심은 아니다.
교회가 왜 어려워지는가? 이 기준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좋은 교회란 무엇인가? 좋은 교회는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이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있는 교회이다. 영혼을 살리는 교회이다.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
정직이 살아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다.
이것이 성경의 기준이다. 이런 기준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다면
“네가 어떻게 기독교인이냐?”라고 물어야 한다.
아니라고 하면, 인본주의자로서는 정당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또 그렇다고 하면, 예배자가 되는 것,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 말씀의 사람이
되는 일에 힘쓰게 될 것이다.
이모든 것을 갖추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모습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결국 기준을 제대로 잡을 때 성도는 성화되고, 변화된다.
이사야가 한 일, 예레미야가 한 일이 무엇인가?
바로 기준을 세우는 것이었다. 당장 망해가는 나라를 건지는 일이 아니라 미래의 후손들에게
남길 기준을 남긴 일이었다. 그 말씀이 나중에는 미래를 변화시켰다. 끝까지 기준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기준을 세우는 사람이 되라.
변화에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
그러나, 기준을 붙들면 나중에는 모두 변화하게 되어 있다.
청년문화를 '밤의 문화'라고 한다. 그래서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말은 기준을 놓치고 있다. 청년문화는 '새벽문화'라는 기준을 붙들고 나가라.
그럼 결국 시간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기준을 붙드는 자를 통해서 일하신다. 여기 귀중한 말씀이 있다.
스가랴서 4장 10절을 보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다림줄이 무엇인가?
건축 현장에서 수직을 유지하도록 추를 달아 늘어뜨린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다림줄을 들고 서 있는 스룹바벨을 기뻐하셨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붙들고 서 있는 청년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는지 생각해보라.
기준, 제도화의 중요서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 기준을 세우라고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세상으로 들어가면 세상은 뒤집어지게 되어 있다.
- "감정으로 일하라"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