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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망할 수는 있어도 피할 수는 없습니다 / 욘 1:1~17

    • 류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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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5.25 - 01:48 2012.05.25 - 01:45  1628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야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의 기쁨이란 말씀이 임할 때 일어나는 것이죠. 선지자에게 가장 고통이란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실 때 말씀을 기다려야 하는 어둠의 시간입니다. 목사로서 가장 힘든 것은 전해야 할 말씀을 찾지 못할 때입니다. 주일 예배는 다가오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하고 묵묵히 기다려야 할 때 이는 참으로 고통입니다. 저는 설교학을 가르칩니다. 설교학 교수라고 툭 치면 설교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가오는 설교 앞에 말씀이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을 때의 고통과 예배 직전까지 설교 준비가 되지 못할 때는 차라리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선지자 요나는 행복한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요나가 할 일을 하나님께서는 말씀해 주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지자의 선택은 단 하나죠. 그냥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의 대답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3절에 요나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니라."

 

도망하는 요나.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께서 희미하게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직접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가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하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일 때 쓰는 표현입니다. 요나가 어느 정도로 타락한 선지자이기에 이렇게 반응한단 말입니까? 정말 타락하여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선지자가 되어 버렸을까요? 요나의 반응을 이해하려면 요나가 누구인지 니느웨가 어떤 곳인지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가 누구입니까? 열왕기하 14:25절에 요나를 선지자이며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선지자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선지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입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요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시니라"는 표현은 조금도 이상한 말이 아니죠.

 

그러나 요나는 오늘 여호와 얼굴을 피해 도망하기로 결단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요나가 하나님을 정말 피하고 싶어서일까요? 해답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었습니까? "요나야,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 여러분, 니느웨가 어떤 곳이죠? 앗시리아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앗시리아는 당시 가장 강대국 중 하나요 이스라엘의 적대국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죠. 구약에 나훔이란 곳이 나옵니다. 나훔은 악한 나라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대하여 저주를 퍼붓는 예언을 담은 말씀입니다. 왜 니느웨를 이토록 저주합니까? 나훔 3장에 보면 앗시리아 사람들의 잔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왜 그렇습니까? "마술의 주인 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의 대적이 되어 네 치마를 걷어쳐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열국에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일 것이라." 앗시리아를 향해 불일 듯 타오르는 하나님의 분노가 보입니다. 앗시리아인들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십자가형을 개발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전쟁에서 남자와 아이들을 죽이고 여인들을 겁탈하고 종으로 삼은 패역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요나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곳은 바로 이 사악한 백성의 수도인 니느웨입니다. "니느웨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회개하라고 전하라."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무엇을 원하시는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지시하는 니느웨는 동쪽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서쪽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배를 탑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서 말이죠.

 

왜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 도망할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나는 말씀을 전하는 선교적 사명이 두려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의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치 이슬람교도들이나 북한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순교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4장에 가서 밝혀집니다. 3장에 보면 요나가 우여곡절 끝에 복음을 전합니다.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겨났어요.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하며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왕까지 회개하고 짐승들도 금식시키며 회개운동이 일어납니다. 민족의 회개 운동에 요나가 어떻게 반응합니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분노로 휩싸입니다. 4장 초반에 요나가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다."

 

여러분, 요나가 왜 이렇게 분을 내고 있죠? 전도해서 위대한 열매가 나타나는데 감격해야 할 선지자 아닙니까? 문제는 요나가 하나님을 잘 못 이해한 것에 있습니다. 요나는 그의 하나님을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다른 민족은 율법도 없이 살아가는 개와 돼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런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요나. 그의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우주적인 하나님을 지역적인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거죠.

 

요나는 도망합니다. 동쪽 니느웨를 떠나 서쪽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요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어떠합니까? 말씀이 지시하는 곳으로 향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니느웨로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의지대로 다시스로 가고 있습니까? 민족적 한계에 갇혀 말씀을 전하기를 거부하고 도망하는 요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말씀을 전하는 데는 큰 관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 믿지만 선교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을 특별한 사람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것이 누구에게 나타난 일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에요.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알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불순종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해요.

 

제가 가르치는 총신대학원에 일본에서 온 한 자매가 있어요. 일본 선교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어느 날 이렇게 고백해요. 동아리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본 선교사로 살아갈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공통적인 고백 가운데 하나가 "다른 나라는 몰라도 일본은 싫다"라는 말이었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일본을 향한 긍휼한 마음을 주셔서 일본 선교 동아리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니느웨는 무엇입니까? 저 사람만큼은내가 예수님을 전하고 싶지 않아서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 없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

 

니느웨로 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생각에 갇혀 타인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들을 광주리에 담아 내리실 때 베드로는 결단코 먹지 않겠다고 소리칩니다. 하나님이 정결하게 하셨다고 말해도 자신의 생각으로 먹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베드로 같은 사람 우리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판단 근거는 성경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념일 뿐입니다. 신앙은 성경에 근거하지만 신념은 자신의 생각에 근거합니다. 니느웨로 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나만 믿으면 그만이다는 절름발이 신앙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은 누구를 통해 구원하기로 되어 있으니 내 신앙이나 잘 지키면 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지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주님을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척도를 보려면 내 눈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보면 됩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부탁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우리 주님 아니십니까? 우리가 부담스러워 하는 그 사람들을 위해 주님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바로 그 이웃을 위해 비참하게 죽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주님 아니십니까? 이 주님의 한 없는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들도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라도 주님의 사랑으로 니느웨를 말씀으로 정복하시는 여러분의 일생 되시길 축원합니다.

 

요나를 보면 한 가지 이상한 것을 발견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장에 요나의 길을 막고 회개하게 하지 않으실까?

왜 하나님의 사람이 범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당장에 벌을 내려 멈추게 하지 않으실까?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3절에 보니 도망하려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납니다. 마침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를 만난 요나. 죄를 지으려고 할 때 오히려 상황이 척척 풀려가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문제죠. 이웃을 돕거나 자신을 부인하고 사랑하려면 그렇게도 생각이 많고 넘어야 할 난관이 많은데 악을 행하려면 그렇게도 척척 잘 풀리는 인생. 죄를 짓기 위해서는 주님을 묵상해서도 절대로 기도해서도 안되죠. 여러분 한 가지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을 순종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죄를 짓는 데는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의 본성은 죄를 짓는데 완벽합니다. 세상은 죄를 짓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즉시로 가로 막지는 않으십니다. 하루에 텔레비전을 3시간을 보면서도 성경을 3분도 읽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멀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전화는 1시간을 해도 기도를 10분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을 당장에 벙어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두시는 거죠. 여러분 이 때 조심해야 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두실 때 이 때 조심하고 돌아와야 해요.

 

주님께서 아무 말씀 없으실 때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기계로 만들지 않으시고 하나씩 간섭하는 어린아이로 보시지 않고 우리를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우리의 의지대로 살아갈 때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시는 주님의 아픈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를 보시면서 마음 졸이시는 주님을 생각해 보세요. 처음에 하나님이 관심 없어 보일 때 그러나 양심에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할 때 여러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통로입니다. 상황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이 정도에서 들으셔야 합니다. 우리의 몸을 통해서라도 말씀하시면 큰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기뻐하며 순종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다가 혹 기도하거나 믿음의 형제와 말씀을 나누는 중에 무엇이든 하나님 말씀하시면 즉각적으로 순종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순종 이외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금 순종하든지 다음에 순종하든지. 지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행복의 시작입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

 

드디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기 시작합니다. 요나를 찾아오기 시작하신 거죠. 패역한 선지자를 어떻게 찾아오십니까? 하나님은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십니다. 이 때 ‘폭풍을 내리다’는 원문의 의미는 ‘세게 집어 던졌다’ 또는 ‘총알처럼 발사했다’는 의미입니다. 자연스런 풍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다는 말씀이죠. 여러분, 한 가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거대한 폭풍에 사공들은 정신이 나갔습니다. 각기 자신의 신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죽은 신이 아무런 응답이 없자 이번에는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물건을 바다에 던져 배를 가볍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풀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삶에서 생기는 문제 가운데 자연히 생기는 문제가 있고 하나님이 특별히 주시는 문제가 있어요. 무리해서 몸살이 나면 기도해서 낫는 것도 좋지만 쉬셔야 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이 주시는 문제는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해결해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 해결하려 들면 시간과 물질과 힘만 낭비일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 할 주인공인 요나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도 그가 선지자인데 이럴 수가 있을까요? 불신자도 죄를 짓고는 편히 잠들 수 없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편히 잠이나 잘 수 있단 말입니까?

 

아마도 요나의 심경은 이러했겠죠? 하나님을 벗어나 도망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잖아요? 항구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배를 보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처음에는 고민했겠죠. 심각한 죄를 짓고 도망하는 사람의 심리가 어떨까요? 너무나 극심한 죄를 짓고 나면 그냥 잊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 아닐까요? 적당한 죄는 즉시로 회개하려 하지만 너무나 거대한 죄는 회개할 마음까지 잃어버리게 할 때가 있죠. 여러분 죄란 내가 잊어버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죄라는 것은 반드시 용서를 받아야 할 일이지 잊혀져야 할 대상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 받은 인생이라면 호흡하듯 죄를 짓고도 고민 없이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결국 죄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대학원을 다닐 때였습니다. 신학도는 아니었지만 주님을 위해 불꽃처럼 살려고 헌신하던 시기였습니다. 하루는 너무나 양심에 거슬리는 죄를 짓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무슨 죄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끄러운 죄였죠. 회개를 해야 하는데 회개할 힘이 없는 거예요. 그냥 모든 것을 잊고 싶었죠. 잠시라도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었죠. 그 더운 여름 날 겨울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 쓰고 잠을 청했습니다. 일어나면 하나님께 회개해야지. 그냥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잊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중에 회개한다고 미룰 것이 아니에요. 이 때 하나님께서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고통 하던 가운데 잠이 깊이 들었는데 전화가 울렸어요. 포항에서 한 자매가 전화를 한 것입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자매가 말했습니다. "오빠, 방금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은 오빠를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왜 오빠는 이렇게 하나님을 슬프게 하느냐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할 수는 있었지만 숨을 수 있는 땅은 한 치도 없더군요. 시편 139: 6-10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은 바다와 음부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땅은 한 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문제는 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 해결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 있지 못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보고 무엇이라 합니까? 잠자는 요나에게 하는 선장의 말입니다.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여러분,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요나가 보입니까? 폭풍을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어떻게 찾아오십니까? 사람들은 서로가 제비를 뽑습니다. 요나가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밝혀졌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할 수는 있어도 숨을 곳은 없습니다. 우리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과 인내만 못합니다.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이러한 인내 때문에 우리가 호흡하고 사는 것 아닙니까?

 

폭풍우를 보내어도 정신차리지 못하고 잠만 자는 요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요나. 제비까지 뽑도록 뒷짐 쥐고 앉아 있는 요나. 결국 제비를 통해 하나님이 찾아오게 만드는 요나. 여러분 하나님 이렇게 피곤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한 마디 하면 알아 들어야지. 마른 하늘에 폭풍이 일어나면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부탁할 때쯤이면 당연히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습니까? 어떤 방법이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오실 때 그 때가 은혜의 때 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가 돌이키고 일어나서 다신 한번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도망하는 것은 근본적인 죄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이 찾아 오셔도 회개하지 않고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 더욱 큰 죄입니다.

 

선원들이 묻습니다.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그제서야 요나가 대답합니다. "내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지만 지금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중이라고." 요나는 비로소 결단을 내립니다. "나를 바다에 집어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잔잔하리라. 이 큰 폭풍이 나의 죄 때문인 줄 내가 아노라." 드디어 하나님께 회개하는 요나의 모습.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할 때 일어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 회개가 심령에서 시작될 때 해결은 시작됩니다.

 

영국 사회가 병들어 갈 때 신문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인이였던 체슬턴(Chesterton)에게 질문했습니다. "무엇이 가장 큰 문제입니까?" 그의 대답은 한 마디였습니다. "내가 문제요." 그렇습니다. 나의 문제로 여길 때 해결은 시작됩니다. 민족을 가슴에 품고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생명록에서 없앨지라도 민족을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모세와 바울로부터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역대하 13:13-15절에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리니."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민족의 문제인 땅의 문제까지 고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묵묵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요나에게 선원들은 참으로 착한 마음씨를 가졌습니다. 어찌하든지 요나를 살려 보려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돌리려 합니다. 그러나 최고의 베테랑 선원도 하나님이 내리는 폭풍우를 뚫을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문제는 하나님과 해결해야 합니다. 아무리 마음 착한 사람의 최선의 노력도 하나님과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어요.

 

마침내 그들은 요나를 바다에 집어 던집니다. 요나를 던지자 바다는 곧 잠잠해 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하는 사명자 요나는 그렇게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사명인의 인생을 살아드리지 못하고 그렇게 죽어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그렇게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요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이셨고 결국에는 죽음 가운데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

 

거대한 바다에 던져진 요나. 끝없는 죽음으로 던져진 요나.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그냥 버리지 않았습니다.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예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합니다. 진정한 기적은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보내신 하나님이 요나를 살리신 것이지요. 요나는 당연히 죽음을 예상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정면으로 거부하고 도망하는 선지자를 어찌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으시겠어요? 죽어 마땅한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요? 거대한 물고기를 보내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고기 배 속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사실일까 질문하기도 합니다. 기록을 보니 1758년과 1771년 고래 배속에서 사람이 살아난 기록이 있더군요. 요나에 관한 재미 있는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한 자매가 비행기 안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어요. 한참 쳐다보던 남자가 물었죠. "설마 그곳에 기록 된 것을 다 믿지는 않죠." "아뇨, 다 믿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요." "그럼 그 고래에게 먹힌 사람 있잖아요.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 그걸 믿는단 말이요?" "저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지만 그대로 믿어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요." 천국에 가면 요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어 볼 겁니다." 그 남자가 묻습니다. "만약 그가 천국에 없으면 어떡하실래요?" 한참 생각하던 여인이 대답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한번 물어보세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바다의 물고기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태양도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은 하늘의 메추라기도 보낼 수 있는 분이십니다. 바위를 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은 어떤 물고기에게라도 명령할 수 있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거대한 물고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멋있어요. 유유히 바다를 유영하다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 한 치의 틈도 없이 요나를 받아 삼키는 이 물고기. 순종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죽음 가운데서 요나를 살리셨습니다. 폭풍우를 왼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은 오른 손에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랑을 쥐고 계셨습니다. 이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향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폭풍 가운데 물고기를 보내셔서 요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죽음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요나를 이렇게 세우십니까? 당신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죽은 영혼을 살리시려고 하나님은 다시 요나를 찾아오십니다. 아직도 니느웨에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나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 요나를 다시 세우십니다. 우리는 요나를 보면서 "어찌 선지자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믿기 어려운 표정을 짓습니다. 마치 그런 표정 가운데 자신은 이 정도는 아니라는 느낌을 넌지시 보이면서 자신을 위안하려 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도 직접 말씀만 해 주시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잠시 마음을 정돈하고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실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을까요? "내가 말씀을 다 주지 않았는가? 기록까지 해서 순간마다 읽을 수 있도록 다 주었는데. 말씀뿐 아니라 이제는 내가 아들을 보내지 않았는가? 아들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세상에 보내고 그 분을 말씀을 통해 만나게 하지 않았는가?"

 

문제는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을 듣지 않는 내가 문제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사모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나의 어두운 영이 문제입니다. 나를 찾아오실 때 주님의 얼굴 빛을 피하는 나의 죄성이 문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들을 수 있는 귀를 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하시면 즉시로 순종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길 바랍니다. 사명자는 죽을래야 쉽게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도 나에게 한 날이 주어졌다면 주님께서 아직 사명이 있어 이 땅에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줄 알고 주님을 위해 다시 한번 불꽃처럼 타오르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  총신대학원 설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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