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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 부인 / 마 26:6-13

    • 이수영
      *.155.90.95
    • 2011.07.23 - 23:05 2011.02.12 - 04:28  2155
 오늘 본문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한 여인의 행동을 앞에 놓고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생각이 상반되고 있음을 봅니다. 본문 8-9절에 보면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여자가 잘못했다고 화를 내고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가 잘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있었던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3년 동안 꼬박 주님을 따라다니며 듣고 보고 배운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묻게 만듭니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예수님의 생각과는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의 상당부분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감추시거나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돌려 말씀하시곤 한 데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가 점점 그 마지막 시점에 가까워질수록 전에는 감추셨던 것들을 분명하게 드러내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럴수록 오히려 더 제자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 엇갈리게 드러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말씀을 안 하셨다가 나중에는 분명히,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앞으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드러나는 그들의 생각은 주님의 생각과는 너무나 딴판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것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한 직후였습니다. 마16:13-20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관한 기사를 읽을 수 있는데, 곧 이어지는 21절에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베드로의 즉각적인 반응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다음 절 2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23절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신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시는 예수님과는 달리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벌써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한 주일쯤 뒤(cf. 눅9:28)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다가 변화하신 모습을 보이신 일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9절과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또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눅9:28-36에 보면 변모하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그 말씀하신 그 내용이 31절에 있는 대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 기자는 곧 이어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라고 덧붙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헛소리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세상에 내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할 일을 생각하시는 예수님과, 주님을 좇는 사람으로서의 지상의 책임과 그 수행을 위한 고난 같은 것은 안중에 없이 황홀한 삶을 즐길 일에만 생각이 팔려 헛소리를 하고 있는 제자들의 상반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과 세 제자들은 나머지 아홉 제자들과 다시 합류한 후 갈릴리로 갔고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셨다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는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과 죽으심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이 가졌던 주관심사가 무엇이었습니까? 마18:1은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했다고 쓰고있고, 눅9:46은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났다고 말하며, 막9:34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 속에 빠져있는 제자들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까지도 제자들을 지배했던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를 지는 생각이 아니라, 남보다 더 커지고 남보다 먼저 되며 남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생각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20:17-19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가시며 또 한 번 머지 않아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20절부터 보면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20),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1) 요구하고 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고 했습니다(24).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는데 이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생각하시는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물으셨을 때에 "할 수 있나이다"라고 야고보와 요한이 대답했다고 했는데 그들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실 그 쓴 고통의 잔을 생각하며 그렇게 대답했을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그들은 필경 메시아 왕으로 등극하실 예수님의 좌·우에서 마실 왕궁의 달콤한 포도주 잔을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잡아죽이려는 음모가 한창 진행중이던 유월절 이틀 전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임박한 임종을 준비하며, 따라서 그 장례준비의 의미로서 그의 몸에 향유를 붓는 일을 용납하신 이 예수님 앞에 드러난 제자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습니까? 막14:5에 보면 예수님께 부어진 향유가 300데나리온 이상 받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면 대충 4인 가족을 부양할만한 근로자의 10개월치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문제는 그만한 가격의 물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겠는가 하는 의견상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몸에 향유를 바르는 것을 허락하시는 행동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실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데, 제자들은 그토록 반복되는 주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으심의 임박한 현실성도, 그 죽으심의 크나큰 의미도, 그에 따른 자신들의 할 일도 도무지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누가 더 먼저, 크고 좋은 것 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에 눈이 멀어있었다는 사실이 진짜 문제인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들의 진짜 관심사는 그 향유를 어떤 일에 사용하는 것이 가장 가치있을 것이겠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더 크냐, 누가 주님의 좌·우 자리에 앉을 것이냐 하는 문제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예수님의 총애를 독점할 만한 행동을 하는 또 한 사람이 예상치 못하게 등장하자 불안감과 함께 신경질적인 반응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8절에 있는 대로 "무슨 의도로" 그 비싼 것을 허비하느냐고 말하며 "분개"한 것은 그들의 그러한 심리상태를 잘 엿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실 십자가의 죽음을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그저 말씀으로 예고하시던 것과는 달리, 십자가에서 찢기실 살과 흘리실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게 하신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입니다. 그날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써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을 택하여 자기자신이 세상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어린양이심과 그가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사건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엄숙하고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는 역사적 성만찬이 행해진 직후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눅22:24에 보면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했습니다. 무릇 누구에게나 자기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가까운 친지들에게 말한다는 것,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절친한 사람에게서 그의 죽음을 예고받는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실 때마다 드러난 제자들의 생각은 왜 이렇게 엉뚱하기만 한 것이며 왜 그렇게 예수님의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었겠습니까? 주님을 좇는다 하면서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주님을 따라 수고와 고난이 기다리는 세상으로 나아가기보다는 황홀한 상태를 즐기는 데에만 만족하며 거기에 주님을 묶어두려 하고,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남을 섬기려 하기보다는 주님 덕분에 남보다 커지고 먼저 되고 좋은 자리에 앉아 섬김을 받는 일에만 관심하는 것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교만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번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부인, 이것이 주님을 참으로, 끝까지 따를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이 자기부인이 없을 때, 예수님을 좇는다 하면서도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세상에서의 책임을 망각한, 맛 잃고 길가에 버리어져 발에 밟히는 소금이 되며,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온갖 세상적 탐욕과 교만의 노예가 되어 끊임없이 다툼과 미움 속에 살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몸으로는 좇았지만 아직 온전히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고 급기야는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반드시 주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세상적인 욕심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예수님을 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친 사람들이 누굽니까? 불과 그 몇 일 전까지만 해도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하며 주님께 환호하던 바로 그 사람들 아닙니까?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부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한 때는 열심있고 용기있고 지혜있는 듯이 보이고 훌륭한 신앙의 면모를 보여주다가도 그 다음 순간에 지극히 비신앙적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어느 한 순간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맥없이 무너질 수 있음을 다른 사람 아닌 베드로에게서 보지 않습니까?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라고 장담하며, 칼을 빼어 휘둘러보기도 했지만, 지나가던 여종아이의 한 마디 말 앞에 어처구니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이 시간, 지난 한 해 동안 한 주도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은 했지만 사실은 주님의 뜻과는 늘 어긋나는 생각을 품고 살아온 것은 아닌가 돌아봅시다. 오늘 살펴본 예수님의 그 못난 제자들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3년이 아니라 30년 또는 그 이상의 오랜 세월을 주님을 따른다 했지만 내가 과연 나 자신을 온전히 부인했었는지 되돌아봅시다. 베드로 이상으로 열심과 충성을 주님과 주의 몸된 교회에 바쳤다 하지만, 사실은 나의 명예와 나의 만족을 위해서, 나의 교만과 나의 욕심을 따라 행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좋다고 하실 일을 좋지 않다고 여기고,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하실 일을 맞다고 우기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시신 그 쓴 고통의 잔이 아니라 달콤한 포도주 잔을 기대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이켜봅시다. 그리고 새해에는 주님꼐서 말씀하신 "자기부인"을 바르게 깨닫고 실천하며 주님의 뜻과 일치한 생각을 품고 그와 함께 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  새문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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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 마 21:28~32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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