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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부르심과 기드온의 첫 임무 / 삿 6:14~27

    • 김서택
      *.155.91.47
    • 2012.02.29 - 21:12  1895

  정치권과 관련된 사람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시 대통령이 자기를 장관으로 불러 주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합니다. 아무래도 장관자리에는 막강한 권력이 주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시절이 어려울 때는 장관보다 더 불쌍하고 비참한사람이 없습니다. 몇 년 전 한 장관이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대표로 보냄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다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는 강대국 대표를 찾아가 온갖 사정을 다해 가며 얼마간의 양보를 얻어 내야 했습니다. 그는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이 나라 저 나라 대표를 찾아다니며 사정을 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협상을 끝내고 돌아온 후, 농수산물을 개방한 책임을 지고 장관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그에게는 권리 대신 의무와 책임만 있었습니다. 아무리 장관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자리는 절대 탐내지 않을 것입니다. 강대국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사정하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실컷 하고서도 결국은 국내에서 매국노 소리를 얻어먹고 쫓겨나야 하는 악역을 누가 감당하려고 하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이 세상의 죄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회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회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에 대해 하나님의 귀한 뜻이 있음을 보이시고 정욕대로 살던 삶에서 돌이켜 그의 은혜 안에서 살도록 부르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 말고 또 다른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 내기 위해 영적인 전투를 하는 사역자로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장관 자리를 주겠다는 부름과 다릅니다. 권리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긴장과 책임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이 자리는 강대국 대표들을 찾아다니면서 사정사정하고서도 욕만 얻어먹는 정도의 자리가 아닙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해내야 하는 자리입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자들에게는 자기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강한 자들과 싸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며 백성들의 마음을 바른 신앙으로 돌이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르심을 받은 종들은 한결같이 그 일을 할 수 없노라고 사양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사사기 6:14이하에서 기드온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극구 사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은 이런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설득해 이 일에 나서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이 기드온을 찾아와 하신 말씀은 그분이 아직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스라엘이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에는 기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적이 없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싫어하여 버리신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과 우상이 그분의 능력을 막고 있는 것이며, 이제 기드온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불신앙과 우상을 제거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6:14). 이것은 믿지 않던 자를 불러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게 하시는 회개의 부르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 중 한 사람을 특별히 불러 자기 백성들의 죄와 싸우게 하시며 그들을 사탄의 세력에서 건져 내게 하시기 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14절은"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얘기를 꺼낼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이 보통 어떻게 합니까? 우선 쉬운 말부터 하다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정말 말하고 싶었던 본론을 꺼내지요. 하나님도 갑자기 기드온을 돌아보시면서 그를 찾아온 본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본론이란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말고 지금 기드온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 이상은 높은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때, 사람은 자꾸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면서 엉뚱한 공상에 빠지게 됩니다. 혹시 누군가 나타나 이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는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우연한 행복이 찾아와주지는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누군가 나타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 주지는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미디안과 싸울 사람은 바로 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런 막연한 기대를 버리고 그 자신의 힘으로 미디안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대로 나가서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어요. 지금 기드온과 이스라엘 백성은 미디안사람들을 이길 힘이 없어서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나가서 미디안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당연히 자기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6:15). 므낫세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서도 가장 작은 지파였습니다. 게다가 기드온은자기 집안이 므낫세 지파중에서도 가장 작은 집안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은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힘도 없고 사람도 없는 집안에 속한 보잘것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하나님만 믿으면 다 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하나 가지고 나갔는데 그 믿음이 불발되면 어떻게 합니까? 믿음하나 가지고 나갔는데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사람은 낙하산이 펴질 것을 믿습니다. 물론 그 낙하산은 좋은 회사에서 잘 만든 것이니만큼 제때 잘 펴질 것입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하리니 네가 미디안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6:16). 이기고 지는 것은 기드온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의 말에 따르냐 따르지 않느냐는 그의 책임이 아니라는 거예요. 단지 그는 하나님께 사용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외에 모든 것은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한 사람도 설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기만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명하신 일이고 함께하시는 일이라도 사력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에는 거의 멸망을 눈앞에 둔 것처럼 절망적인 순간에 닥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 힘으로 싸우는 것과 하나님의 힘으로 싸우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싸울 때에는 그 자체는 힘들어도 미래에 대한 염려나 실패에 대한두려움이 없습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그 결과는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저 사용될 뿐입니다. 물론 일은 죽도록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을 갉아먹는 두려움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입니다. 직장상사나 동료 사이에 신뢰가 없는 데서 비롯되는 이런 스트레스는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이런 스트레스를 오래 받은 사람은 거의 정신병자가 되기 쉽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일 자체가 어려운데서 비롯되는 스트레스인데,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사람은 이런 스트레스가 있어야 의욕이 생기고 발전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학생이 자기를 미워하고 험담하는 친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시다. 그 학생은 자꾸 아파서 한 번 두 번 결석하다가 결국심각하게 병들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또 다른 예로 어떤 학생이 새로 전학을, 왔는데 아주 공부를 잘 한다고 합시다. 공부에서 그 학생에게 지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은 이 학생에게 스트레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스트레스입니다. 이 여학생은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일이라고 스트레스가 전혀 없거나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적으로는 훨씬 더 힘들 수도 있고, 때로는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결론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세부적인 일에서는 실수도 할 수 있고 시행착오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기고 지는 것은 기드온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반응하든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임무입니다. 모든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결과까지 우리가 책임져야한다면 그 엄청난 부담을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하고 결과는 그분께 맡기면 됩니다. 결과가 좋아도 자랑할 이유가 없고 결과가 나빠도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여기에 대해 뭐라고 대답합니까?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 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하니라"(6:17~18).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과 함께하셔서 그가 미디안사람을 칠 때 마치 한 사람을 치는 것처럼 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지금 이 말씀을 하신 이가 주님이시라는 표징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표징을 구하기 전에 집에 가서 예물을 가지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왜 표징을 구했을까요? 왜 예물을 가지러 집에 간 것일까요?

  그는 자기를 찾아와 말씀하시는 이분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 분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감히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육신을 입고 찾아오셨기 때문에 기드온은 이분의 말씀과 현실 사이에 엄청난 괴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보통 사람의 모습입니다. 군인처럼 무장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병사를 거느리고 온 것도 아닙니다. 작대기 하나든 여행객일 뿐입니다. 말씀은 믿어졌지만 그 말씀과 현실 사이에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 믿음으로는 이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주 되심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제가 당신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말씀과 현실 사이에는 너무 큰 차이가 있고, 그것을 극복하기에는 제 믿음이 너무 작습니다. 제 눈에 보이는 당신은 너무 평범합니다. 제발 저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지금까지 저에게 말씀하신 당신이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어떤 일을 하라고 말씀하셔도 그 일을 향해 곧 바로 달려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씀과 현실 사이에 너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생각할 때 그 말씀대로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럴 때 그 일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확증해 주시기를 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을 쳐 주시고 보증해 달라는 것이지요. 사실 하나님께서는 도장이 필요 없습니다. 다시 말씀하시면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충분해도 우리 편에서 충분치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너무나도 부족해서 말씀만으로는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기드은은 이것을 구하면서 자신은 집에 가서 예물을 가져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왜 갑자기 예물을 바치겠다고 했을까? 지금까지 너무 정신없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이제라도 예의를 갖추려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서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일까요?

  아마도 그는 빈손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아무래도 예물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거래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즉 자신이 예물을 바쳐야만 하나님이 증표를 보여 주신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이자 감사의 표현으로서, 헌신의 표시로서 예물을 바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즉 '저는 당신이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겉모습만 보아서는 모르는 분 같지만 말씀을 들어보니 정말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께 저의 마음과 삶을 드리려 합니다'라는 뜻으로 예물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드온이 준비한 음식들을 보면 한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가서 염소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6:19). 어떻게 염소 한 마리를 한 사람이 먹을 수 있겠습니까? 또 가루 한 에바는 큰 통을 가득 채울 만한 양인데, 그렇게 많은 떡을 어떻게 한 사람이 먹을 수 있겠습니까? 국을 담아온 양푼도 아마 큰 양푼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식사를 대접하기 위한 예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양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물들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아마도 기드온은 이 하나님의 사람이 군사를 모집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힘을 대해 하나님에 바친 것 같습니다. 이것은 대략 열 명 정도의 인원이 한 끼 정도 먹을 수 있는 양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자기가 모을 수 있는 만큼 힘껏 모아보니 이 정도 양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군대가 먹기에는 적은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기가 바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바쳤습니다. 마치 굶주린 무리 앞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바친 소년처럼, 기드온은 이 어려운 때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거의 마지막 양식을 하나님께 예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은 거래가 아니었습니다. 헌신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가 붙들고 있던 양식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더 큰 부르심을 믿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적은 양식을 포기했습니다.

 

기드온의 예물에 대한응답

  기드온이 하나님께 바친 것은 번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도 아니었고 이런 번제를바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께 자신의 작은 믿음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예물에 놀랍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부으라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6::20~21).

  기드온은 미디안과 전쟁을 하려면 양식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가지고 있던 최선을 다해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기드온이 드린 선물을 양식으로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친히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셨습니다. 그는 음식들을 바위 위에 두라고 한 후, 그 위에 국을 쏟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팡이 끝을 반석에 대니 반석에서 불이 나와 음식을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원래 제물 위에 붓는 것은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는 번제의 극치였습니다. 제물이 어느 정도 타 들어갈 때 그 위에 포도주를 부어 마지막 불꽃과 향기를 일으키는 것은 자신의 안에 있는 마지막 것까지 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에게는 포도주가 없었기 때문에 그 대신 국을 붓게 함으로써 마지막 헌신을 하나님께 바치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어떤 표징을 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보여 주신 표징은 불이 있는 예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였습니다. 이 예배가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기드온의 삶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지 못했던 모든 것을 불로 태워서 없애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번제를 통해 그의 모든 과거를 불살라 버리고 모든 부끄러운 죄들을 용서하시며 완전한 새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과거에 지은 죄를 들추어내서 그를 고발하거나 부끄럽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죄를 성령의 불로 태우셨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는시, 받지 않으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이 가장 큰 역사로 받으시는 예배에는 불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거나 반석에서 불이 나오게 하심으로써 그분이 살아 계시며 그 크신 능력으로 모든 거짓된 신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받으시는지, 받지 않으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안에 즐거움이 있고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는 '내가 지금까지 지어 온 모든 부끄러운 죄들을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다 불태우셨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과거에 내가 실패했던 불신앙의 삶을 들추어내서 나를 부끄럽게 할 수 없다!‘는 뜨거운 확신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하나님의 임재는 기드온을 매우 두렵게 했습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6:22). 물론하나님은 이미 임재해 계셨고 지금까지 실컷 그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마치 얼굴에 수건을 쓴 사람처럼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인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분명히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배 가운데 불이 임하자, 갑자기 수건이 벗겨지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고 심한두려움이 사로잡혔습니다. 특히 그를 두렵게 만든 것은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안심시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샬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감에게 속한 오브가에 있더라"(6:23~24).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을 본 사람은 분명히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모세의 율법을 넘어서는 은혜를 체험시켜 주셨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살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평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친히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집행하셨을 때 기드온은 율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며,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화평이 있다. 하나님이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에 나를 버리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교만해지지만 않으면 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사죄의 확신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기드온의 첫 임무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주신 첫 번째 임무는 엄청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주 작은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것은 므낫세 지파 안에 있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신상을 쳐부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상을 찍고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6:25~26).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로 놀랍게 생각하는 점은 왜 미디안 사람을 치기 전에 므낫세 사람들의 바알 제단과 아세라 신상을 먼저 깨뜨리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몰아내고 미디안 세력을 불러들인 것이 바로 이 바알 신이었고 아세라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것은 그분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한분만 믿지 못하고 다른 신을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땅에서 산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에는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신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는 너무 오래된 신이어서 이 복잡한 가나안의 삶에는 적합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 가나안땅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가나안의 신들도 섬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지역 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역이 바뀌면 신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바알도 섬기고 아세라도 섬겼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이스라엘에서 떠나시게 만들고 미디안 사람을 불러들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기드온에게 요구하신 것은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작은 첫걸음이었습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바알 제단과 아세라 신상을 부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부터 부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떠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놀라게 되는 것은 이 제단과 아세라 신상이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의 관할아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일에 거의 주동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나안의 사고방식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바알을 어느 구석에 숨겨 놓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드러내 놓고 섬기고 있었고, 족장부터 솔선수범해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버지의 둘째 수소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필 둘째 수소입니까? 아무래도 첫째 수소가 더 좋지 않겠습니까? 기드온의 아버지에게는 소가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단 두 마리 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필 둘째 수소를 바치라고 하셨을까? 어쩌면 첫째 수소가 이미 바알에게 바쳐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수소에게 무슨 흠이 있어서 제물로 부적합했을 수도 있습니다.

  25절은 이 둘째 수소가 7년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미디안 때문에 고생한 햇수와 똑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둘째 수소는 미디안의 공격 가운데 태어나서 미디안에게 고통당하는 내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아온 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이 수소를 바치게 하심으로써 이제 미디안의 고통은 끝났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7년 동안 지은 죄와 고통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며 이제 다시는 미디안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에서 7년 된 수소를 바치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아세라 신상을 찍은 나무로 이 둘째 수소를 바치게 하심으로써 '이제 바알과 아세라는 죽었고 미디안의고통도 끝났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바로 이런 선포입니다. 즉 '예전에 나를 부끄럽게 하던 죄 된 생활은 이제 끝나 버렸다!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7년간의 암울했던 기억들은 이 수소와 함께 끝나 버렸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불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성령의 불이 우리 모든 과거를 불사르기를 원합니다. 오랫동안 고통 받아 온 문제가 끝나는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로서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제사장으로 삼아 우상을 부수고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위기에는 누가 하나님의 제사장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먼저 체험한 사람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지만 대낮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6:27). 낮에는 도저히 자기 가족들이나 친척들을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일을 저질러 버렸습니다. 그는 엘리야처럼 낮에 사람들과 대결할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는 대단히 소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밤이긴 했어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분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부수었습니다.

  자기 가족들한테 버림을 받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가문과 성읍 사람들에게 버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기드온이 아니었습니다. 더 이상 므낫세 지파사람도, 요아스의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먼저 가족 안에 있는 우상부터 공격해서 그들의 거짓된 신앙을 책망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야 할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드온이 밤에 이 일을 행한 것은 소극적인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가족들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죄를 책망할 때 필수적인 요소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애정입니다. 죄를 지은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무서운 자존심이기 때문에, 자기 죄를 알면서도 인정하려 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정말 바로잡고 싶다면 그의 자존심을 짓밟지 않는 애정이 있어야합니다.

  기드온의 가장 무서운 원수는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자기 가족들안에 있는 우상이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오늘까지 부수지 못했습니까? 아버지가 싫어하고 어머니가 섭섭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더 이상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막는 이 더러운 우상들을 부술 임무를 맡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만든 원수는 먼데 있는 적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우상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땅에서 사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잘 적응해야 쫓겨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세상적인 방법을 자기들의 삶 속에 끌어들였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미디안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열심히 농사지은 양식과 가축을 다 빼앗아 가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7년 동안이나 빼앗아갔습니다. 돈을 벌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미디안 사람들이 와서 다 가져가 버리는데요.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바알과 아세라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려고 하는 우리 자신이 우상입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을 한 번 보십시오. 가만히 앉아서 켜기만 하면 웃겨 주고 울려 주고 재미있게 해 줍니다. 우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욕망을 끄집어내서 표현해 주고 만족시켜 주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러나 텔레비전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는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세상적인 가치관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잘못인지 조차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살려면 이 세상의 가치관에 맞추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남들이 하는 방법대로 다 따라했습니다. 남들이 하는 방법대로 재태크를 하고 집을 사고 승진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미디안 사람들이 우리 것을 싹 다 가져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IMF가 이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울고 얼마나 더 헐벗어야 우리 안에 있는 우상이 없어지게 될까요? 우리는 돈을 믿고 사람의 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미디안 사람들을 메뚜기 떼같이 보내시면 아무리 돈이 많고 사람이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피를 철저하게 빨아먹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을 부수어야 합니다. 지금 내 안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이 아니면서 신처럼 군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하나님께서 나를 싫어하시게 만들고 있으며 그 능력을 거두시게 만들고 있습니까? 집입니까? 자식입니까? 이성 교제입니까? 공부에 대한 미련입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에 세상적인 가치관이 들어오면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예배에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불이 있는 예배, 내 안에 있는 모든 부끄러움이 성령의 불로 태워지는 체험이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처럼 군림하는 것들과 싸워 이기라는 사명을 기드온에게 주셨습니다. 나중에 기드온은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여룹바알'이란 쉽게 말해서 '바알 파이터'라는 뜻입니다. 거짓된 신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기드온의 임무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정신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강력한 정신이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과 싸워 이기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기드온은 아주 적은 물질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은 군대가 쓰기에는 너무나도 적은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물질을 기쁘게 받아 불로 태움으로써 이 싸움이 양식이나 군사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느냐 아니냐를 가르는 싸움, 곧 하나님의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결과에 매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거짓된 신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세상 방식을 좇아야 한다고 소리 지르는 신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세상적인 가치관들과 방법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에게 불로 임하셔서 이 모든 부끄러운 불신앙을 태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7년의 세월을 끝장낼 제물을 찾아야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눈을 멀게 했습니까? 무엇이 진리를 보지 못한 채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게 했습니까? 기드온은 7년 된 둘째 수소를 바쳤습니다. 아마 그의 집에서는 이 수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7년 내내 신경을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신경을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은 시간이 다 되었고 미디안의 고통은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될 수만 있다면 7년 동안 아껴 온 수소를 바친들 뭐가 아깝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동안 아껴 온 돈뿐 아니라 그 무엇을 바친들 아깝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원하면서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지나치게 은혜를 강조한나머지 책임을 약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임이 없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려면 보리떡 다섯 개와 같은 작은 희생이 있어야합니다. 기드온처럼 얼마 되지 않지만 기쁨으로 헌신하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헌신을 축복하셔서 불로 임하여 기드온과 이스라엘의 죄를 불사르고 그들의 왕이 되어 주셨습니다

/ 「위대한 부흥의 불꽃, 이스라엘의 사사들2」, 홍성사, 32-55

 

- 서울대학교(B.A.)를 나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Th.M)에서 공부했다. 현재 대구동부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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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 왕하6:14-17김남준
  • 거룩한 목적 / 골1:9~12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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